마라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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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의 꿈, 보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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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형운 댓글 1건 조회 13,392회 작성일 18-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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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와우치 유키(31세)
일본 고교 사무직 공무원, 고등학교때 육상선수였으나
성적이 저조하였고 부상으로 마라토너의 꿈을 접음.
동호회 소속으로 보스턴 마라톤 참가하여 남자 1위
- 새러 셀러스(26세)
정규직 마취과 간호사, 대학 재학중 육상 유망주였으나
부상으로 포기, 보스턴 마라톤 여자 2위
- 메리 셔튼리브(42세)
백혈병으로 골수 이식을 2번 하였으나 재발, 항암치료를
받으며 꿋꿋이 견뎌 완치,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참가하였고 3,500만원을 모금하여 암연구소에 기부함.
하프지점부터 남편의 손을 잡고 13시간만인 새벽 0시 18분 완주.
“내 몸은 포기하라 했지만 집념으로 결승선 통과 했다”
물론 이 시간에도 대회 운영진들은 남아 이 마지막
주자에게 완주 메달을 걸어 주었다.

2018년 4월 16일 체감온도 영하 1도, 종일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빗줄기와 초속 13m의 강풍이 몰아치는 보스턴에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우리의 작은 영웅들의 모습이였다.

사람들은 체력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는 마라톤을 왜 하는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 생각으론 이런 것 같다.
첫째, 건강을 위해서 일 것이다.
실제 마라톤 피니쉬 라인을 통과하는 주자들을 보면 배가 나온 사람을 볼 수 없다. 이 한 구절로 충분하다.
둘째,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하기 위해 마라톤이라는 운동을 선택하기도 한다.
꿈은 자신이 선택하고 갖을 수 있는 것이다.
마라톤이란 운동 또한 엄격한 자신과의 싸움을 요구하는 운동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선 매일 몸과 마음을 추스려야 하고 긍정적인 멘탈을 유지해야 한다.
때로는 자신을 정신적, 육체적 극한의 상황에 몰아 넣고
그 순간을 이겨내는 과정을 여러번 겪으면서 내면적인 강인함을 키우면 꿈에 근접하게 되고 이룰수 있다

나에겐 꿈이 3개 있다.
20대에 히말라야 거봉에 도전하고 싶었으나 현실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더 나이가 들어서 트래킹을 통해서라도 하얀 산을 보고 싶다.
40대엔 보스턴 마라톤 코스를 달리는 것이였다.
축구 선수들이 월드컵 그라운드를 뛰고, 야구 선수가 메이져 리그에 서고 싶듯이 대부분의 마라톤 매니아들은 보스턴을 달리고 싶은 것이다.
50대엔 대한민국 심장부라는 강남권에서 반듯한 고기집을 개업하여 좋은 질의 한우를 가장 싼 가격에 판매하며 주 고객인 30~40대 젊은 직장인들의 시끌뻑적한 웃음소리를 듣는 것이였다.

1997년 쯤으로 기억난다.
푸르덴셜 재직시 다른 대학 산악부 출신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나에게 물었다.
형님, 요새도 산에 가십니까?
못가…… 애들, 집사람도 있는데 나만 돌아 다닐 수도 없고 시간도 없어……
그럼 마라톤을 해 보세요.
후에 마라톤에 관한 자료를 검색하다가 보스턴 마라톤에 대해 관심이 생겼고 막연한 꿈을 갖게 되었다.
2001년 일산 호수공원을 뛰다가 80년대 초 대한민국 최고의 마라토너 이홍렬 감독을 만나게 되어 런조이 여의도에 회원 가입을 하였고, 2002년 춘천마라톤에 처음 참가하여 4시간18분으로 첫 완주를 하였다.

현지 시간 10시 30분…..
나는 보스턴 외곽 홉킨턴 마라톤 스타트 라인 대기 행렬 라인에 서 있다.
이제 20분 후면 내가 그렇게 꿈꿨던 보스턴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다. 심쿵이다.
어제 오후부터 계속 비가 내렸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밤에는 눈이 와서 길가에 눈이 쌓여 있다.
반바지와 소매나시 옷으로는 도저히 뛸 수 없어 자켓과 츄리닝바지 위에 비닐 우의를 입었다.
거센 비바람에 벌써 우의 틈 사이로 빗물이 들어온다.
깨끗이 빨아 신은 하얀 마라톤화는 학교 운동장에서 대기하느라 진흙 덩어리고 빗물에 벌써 푹 젖어 발이 시렵다.
엘리트 선수들과 장애인 휠체어 선수들 그리고 3시간대 아마추어 선수들이 먼저 뛴 후 내가 뛸 때까지 거의 2시간을 비를 맞으며 기다렸다.
벌써 한기가 오기 시작한다.
마라톤을 하면서 이런 날씨는 처음이다.
국내 대회라면 건강은 커녕 병이 난다고 포기해야 할 날씨다.
오늘 레이스는 전구간을 걷지 말고 반드시 계속 뛰어야 한다. 10분 정도만 걸어도 저체온증이 올 것이고 그러면 끝이다. 최악의 경우 포기하면 된다. 그래도 산에서 조난을 당하는 것보다는 안전하니깐 좋은 여건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페이스를 늦추자 그래야만 완주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스타트 라인을 밟는다. 하나, 둘~ 하나, 둘~ 마음속으로 호흡을 맞추며 드디어 보스턴 마라톤을 시작한다는 생각에 짜릿한 전율이 온다. 20년을 기다렸던 시작이다.
오늘은 보스턴 전체가 쉬는 국경일이다. 보스턴의 축제일이다.
이곳 시민들은 보스턴 마라톤에 대해 자긍심이 대단하다.
2013년 테러 사건 이후 참가자가 더 늘어 3만명을 훌적 넘어 섰고 시민들이 보스턴 마라톤을 더 아끼게 되었다고 가이드가 귀뜸해 주었다.
Boston strong, Boston strong 하는 응원 구호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주로에는 시민들로 꽉 차있다. 젊은 사람들은 물론 어린이, 나이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도 비를 맞으면서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신다.
송아지만한 개가 뼈다귀 같이 생긴 막대에 응원 구호를 적은 것을 물고 비를 쫄닥 맞으면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정말 개고생이다 라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어떤 중년 부부는 거의 부페 수준의 음식을 차려 비를 피해 밴차량 뒷 트렁크를 열어 놓고 먹고 가라고 손짓을 한다.
구호를 여러 말로 외치지만 영어가 짧다보니,
You got it, Good job, Boston strong 이라는 구호만 귀에 들어온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마라톤 전구간이 바리케이트가 처져 있었고 조금의 빈 공간도 없이 시민들이 나와서 응원하기에 국내대회 때에는 가끔 레이스중 걸터 앉아 쉴 수 있었던 차도와 인도 사이의 턱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커다란 환호가 미안할 정도로 고맙고 감격적이어서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지나온 일들이 차곡차곡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학창시절 입학, 추억, 졸업의 설레임, 첫 직장…
20살 대학 1학년 때 정말로 용기내어 시작했던 영업용 택시 아르바이트,
방학중 반 이상을 설악산에서 보냈던 기억, 인수봉에서의 추락사고, 군대 생활, 소중했던 친구들을 먼저 보낼 때의 가슴 아픈 추억, 나를 아껴주셨던 보고싶은 친구 어머님들의 사랑, 결혼 전 돌아가신 아버지, 집사람과의 첫 만남, 연애시절, 결혼, 내 아이들의 탄생 때의 기억, 7번이나 간판을 내렸던 나의 사업 실패, 경제적 어려움으로 애들의 학업을 충분히 지원해주지 못했던 미안함 그리고 운동을 못해 면연력이 떨어졌던 시기에 발병한 봉와직염으로 강남 세브란스 응급실에 실려가면서 흘렸던 눈물, 대상포진을 앓으면서도 통증에 시달리며 가게문을 열어야 했던 어려운 시절……
정말 15년 동안 체력적 한계까지 느끼면서 휴일 밤낮없이 일했지만 희망이 없었던 암울했던 기억들…
이런 행복했던 시간과 어려웠던 시간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울컥해지기 시작한다.
도로가에 나와 열심히 응원하는 어린 아이들이 손을 내민다.
하이파이브를 하는데 순수한 아이들의 눈을 보니까 눈물이 핑 돈다. 참으려 호흡을 가다듬는다.
눈물이 보이는 모습을 이들에게 보여주기 싫어
땅을 보고 뛰기도 한다.

사실 3년 전까지만 해도 보스턴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도 못했다. 연속되는 사업실패로 처가, 본가, 형제들에의 빚과 은행권의 부채가 산더미처럼 늘어났다.
집에 있는 가전제품, 집기에는 압류 딱지가 붙었다.
이 최악의 상황에서 가족과 헤어질 것도 생각 했었고
나쁜 생각도 때로는 하기도 했다. 희망이 없었다.
1989년 쯤으로 기억난다.
산악인이였던 고 박영석 후배가 증평 신혼집에 찾아왔다. 첫 해외원정 아이거 북벽을 등정하고 정상 돌맹이 하나를 나에게 주려고 찾아온 것이다.
“형님, 저는 1% 가능성만 있어도 에베레스트에 도전 하겠습니다”
그 후로 나는 이 친구의 말을 이제껏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사업을 완전히 접고 경제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2012년 1년 동안 식당 종업원으로 취업을 했다.
다시 성공할 가능성, 보스턴에 갈 꿈도 꾸지 못했다.
빚의 압박감과 가족 생계의 어려움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희망이 없었다.
종업원 생활을 하다 보니 아침 10시 출근, 오후 10시 퇴근이니 아침시간이 있었고 주에 하루는 쉴 수 있었다.
운동화 끈을 묶었다. 그리고 뛰었다. 몸과 마음을 추스렸다.
박영석이의 안나푸르나 조난 사고, 수색 포기
영결식장에 조문을 갔었다. 그리고 고인의 의지와 열정을 되새겨 보았다.
다시 도전하는 거다. 1%의 가능성 이라도…… 내가 꿈을 가졌던 강남 중심부로…
나는 파산 신청 직전 상황이였으나 비겁해지기 싫어 신청은 하지 않았다
집사람 통장에 단 2,600만원이 남았다. 빚은 20배이다. 이수에서 청담까지 한달을 오토바이로 뒤졌다. 양재동 주택가에 권리금 없이 2,000만원 보증금을 주고 모양만 갖춘 식당자리를 찾았다.
한달을 직접 인테리어 공사를 했다. 식당 집기를 사고, 닥트 공사를 하니 남은 600만원을 다 썼다. 고기를 살 돈이 없었다. 친구 3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100만원만 보내달라. 내가 못 갚을 수도 있으니 잘 생각하고 결정하라는 말과 함께…
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였는데 고맙게도 주저 없이 3명 모두 보내주었다.
이제는 진짜 벼랑 끝이다.
농촌 읍보다도 사람의 통행이 없는 주택가 골목이다. 명함, 전단지를 들고 나가 길거리 지나는 행인을 끌고 들어왔다. 주말에는 아파트, 주택가, 경비가 쉬는 일요일에는 건물에 들어가 사무실 손잡이에 명함을 붙였다. 손님이 늘기 시작한다. 인터넷에 맛집으로 떳다. 방송에도 나왔다. 앞이 보이기 시작한다.

20km 지점을 통과한다. 거의 반을 달려왔다. 비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내린다.
2~30m 앞에 태극기가 보인다.
젊은 아가씨 5~6명이 난리가 아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미국 국기 외에는 본적이 없는데 태극기가 보이다니 마음이 찡해진다.
웨슬리여대이다. 세계 1위의 여자 대학교이고 힐러리 클린턴의 모교이다. 모자에 붙인 태극기를 보고 “아저씨 힘내세요”라고 소리친다.
내 딸 또래이다. 악수를 하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살짝 안아본다. 또 울컥하며 눈물이 나온다.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약해진다. 조그마한 감동에도 눈물이 나온다.
주책인가? 아름다운 것인가…… 그래 감정대로 사는 것이 좋은 것이겠지…
보스턴 마라톤에 2001년 이봉주선수가 1위를 하였지만 그 한참 전인 47년 서윤복 1위, 50년에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철이 1,2,3위를 하였다. 70년 전 그 때 그들이 뛰었던 주로에서 태극기를 봤다면 어떠했을까? 나도 이렇듯 뭉클한데 그들은 몇배의 감동을 받았을 것이고 아마 기록도 더 단축되었을 것이다. 발걸음이 더 가벼워진다.

3년전 추석 때로 기억이 난다. 식당 사업이 조금씩 희망이 보일 때였다. 일산에서 런조이 마라톤 회원 58년 개띠 5명이 모였다.
“3년 후에 우리 환갑이다” 환갑 기념으로 한달에 10만원씩 모아서 보스턴에 가자.
나는 무조건 OK, 보스턴 꿈이 보였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는 불확실하였다. 경제적 비용은 감당할 수 있었지만 테이블 10개의 조그만 식당에서 고기, 식재료 구입, 고기 손질, 숯불, 불판 세척, 카운터 일 등 내가 장기간 비울 수 없는 상태였다.
내가 60세 될 때면 이보다도 더 좋은 여건에서 사업을 할 수 있게 목표를 세웠다. 시스템과 인력을 갖추어 며칠 동안 식당을 비울 수 있어도 되도록 사업을 번창시키자는 각오가 생겼다. 그리고 2017년 마침내 양재동 중심가에 땅 100평을 장기 임대하고 내가 건물을 지어 50대부터 꿈꾸었던 식당을 오픈하였다.

30Km를 지나 32Km 지점에 도달했다.
앞으로 10km만 뛰면 된다. 32Km 지점은 최악의 코스이다. 심장 파열 언덕(heart break hill)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진다. 신발은 질퍽이고 발이 퉁퉁부어 압박으로 왼쪽 새끼 발가락 밑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는 느낌이 온다. 츄리닝 바지를 입어서 사타구니 안쪽 봉제선에 살이 쓸려서 쓰린 통증이 온다.
이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아니 못한다…..
다만 멈추지 말자는 마음 속에 주문만 되새길 뿐이다.
주변에 함성 소리도 윙윙 거릴 뿐이고 그들의 환호에 답례를 할 힘도 없다. 뒤에서 주자들끼리 이야기 하는 것이 “형운아, 힘 내. 넌 할 수 있어”라고 환청처럼 들린다.
보스턴에 오기까지 충분한 운동을 하지 못했다.
나를 대신할 정육 기사를 2개월 전까지 뽑지 못했고 그나마 시간이 나는 날은 미세 먼지 때문에 제대로 운동을 하지 못했다. 그나마 본격적인 운동은 구정 이후 부터 가능 했었다.

38Km 지점을 통과한다. 여기서 부터는 보스턴 시내로 진입을 하지만 해안가로 근접하면서 바람이 더욱 강해진다.
나의 주 연습 장소인 양재천에서 운동을 할 때 날씨도 중요하지만 바람도 많은 영향을 준다. 초속 5m만 돼도 뛰기가 상당히 어려웠었다.
현재 풍속은 비를 포함하여 초속 10~15m이다. 세계 최고의 마라톤 군단 케냐 선수들이 추위를 이기지 못한 채 잇단 기권으로 일본 선수가 선두로 나선 곳이다.
시내에 어느 정도 진입하니 저 멀리 푸르덴셜 본사 빌딩이 보인다. 피니쉬 라인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내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과 용기, 삶의 자세를 가르쳐 준 회사이다. 정말 좋은 회사였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보게 되다니…
마지막 코너를 돈다. 500미터 정도 남았다. 비닐 우의를 벗어 던진다.
사진으로 많이 봤던 곳이다. 2013년엔 폭탄 테러사건도 발생한 곳이다. 피니쉬 라인 아치가 보인다.
눈물이 난다. 어떻게 참을 수가 없다.
이를 악물고 전력질주를 해도 멈추지가 않는다.
피니쉬 라인을 밟았다.
허리를 구부리고 숨을 가누는데 계속 눈물이 난다.
진행요원인 중년 여인이 내 어깨를 토닥이면서 완주 메달을 걸어준다.
내 눈을 보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Are you OK?
No problem 이라는 답변이 울먹이며 나온다.
물론 내 눈물의 의미를 알면서 거는 말이다.
입술이 파래진 내 얼굴을 보고 알루미늄으로 된 방한우의를 덮어주고 나를 꼭 안아준다.
그리고 엄지를 치켜들며 말한다.
“You are a winner~!”

내 인생에 나를 지켜준 고마운 것이 두가지가 있다.
집사람 그리고 마라톤.
2018년 4월 16일 오후 4시, 나는 보스턴 마라톤 피니쉬 라인에 서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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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혁님의 댓글

이정혁 작성일

역경을 이겨낸 사람이 아니면 이번 보스톤 마라톤도 완주를 못했을꺼라 생각됩니다. 그기쁨 오래오래 간직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