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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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마라톤과 백두산 탐방기(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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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용일 댓글 2건 조회 21,890회 작성일 12-07-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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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마라톤과 백두산 탐방기(3편)
백두산에 오르고 집안들러 귀로에 듬

11. 백두산 국경비(북한)과 백두산정계비(조선)
그런데 이런 우리의 성산 백두산이 더 이상 우리의 것만도 아님을 실감케 한 것은 바로 이곳에 서 있는 37호(종전에는 5호임) 국경비와 엉성한 경계줄의 존재였습니다.
이 5호비와 경계줄은 물론 중국과 북한간의 국경비이며 경계표시인데 이전에는 경계줄이 경계비에 잇대어 있었는데 이제는 비에서 북한쪽으로 10여미터 들어가 있어 경계비 일대는 관광객들의 터전이 되어 있고 양국의 경비병들도 없어 겉으로 보기에는 이곳이 국경이란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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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5호비는 북한과 중국간의 21개 국경비중 하나인데 6호비는 5호비에서 천지를 가로 질러 동북쪽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는 북한쪽 천문봉부근에 있으며 중국 길림성 지도에는 5호와 6호를 잇는 직선을 천지를 분할하는 경계선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북한과 중국은 1962년 비밀조약인 조중변계조약에서 백두산 천지둘레의 2500m 이상 16개봉 중 9개를 중국쪽에, 나머지 7개만 북한에 속한 것으로 정하였고 위 천지의 경계에 대하여는 확실치 않으나 북한은 천지전체를 북한영토로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경계비 1내지 4호는 북한쪽 관면봉에서 시작하여 서북방향의 와호봉 제운봉으로 연결되는 코스에 있습니다.

위 경계비는 각 압록강 두만강 발원지점사이의 봉우리들을 따라 세워진 것인데 21호와 23호비는 북한측에서 두만강 원류로 지적하는 홍토수(洪土水)와 중국쪽의 각 뤄류허(弱流河), 무수린허
(毋樹林下)의 합수지점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압록강·두만강을 기준으로 한 위 국경은 오래전부터 우리(조선)와 중국이 다투어 왔는데 소위 간도문제로 알려진 영토분쟁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1712(숙종 38년) 세워 진 백두산 정계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청나라 강희제의 명을 받은 오라총관 (현재 길림성장 해당됨) 목극등이 두만강(중국은 토문강) 발원지의 현장을 답사하여 백두봉 동남쪽 4km 지점 현재 북한내에 정계비를 세웠는데 그 비에 두나라 경계를 ‘서위 압록(西爲鴨綠) 동위 토문(東爲土門)’이라고 기재하여 이후 우리는 토문이 송화강 상류인 토문강이라고 하고 중국(청)은 토문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여 왔으며 중국은 아예 두만강이란 이름조차 쓰지 않고 토문강으로 명시하고 두만강변의 국경도시도 토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정계비와 함께 비에서 강발원지까지 흙과 돌로 담을 쌓아 두었는데 정계비와 토퇴, 석퇴(현재 북한내 위치함)를 따라가면 토문의 발원지는 송화강 상류에 있는 현재의 싼다오(三道) 우다오바이허(五道白河), 헤이스허(黑石河)로 추정되는데 싼다오는 김좌진 장군의 항일 전적지인 청산리에 가까운 곳에 있고 우다오바이허등은 산다오에서 남쪽으로 즉 백두산쪽으로 멀지 않은 곳입니다.

12. 간도문제(레지선등) 백두산·천지영유권과 중국의 동북공정
위 간도문제와 정계비 문제가 본격화 된 것은 1883년 (고종 20년) 서부경략사로 갔던 어윤중이 간도주민의 호소를 듣고 정계비와 토문강의 원류를 조사한 후 청에게 간도는 조선의 땅임을 주장하였고 청과 1885, 1887년 두차례 감계회담을 가졌으나 타결을 보지 못하였습닏.
이후 일제의 강압적인 을사조약으로 조선은 외교권을 빼앗겨 결국 1909년 일제는 청과의 소위 간도조약으로 두만강 상류인 석을수(石乙水)를 국경선으로 정하여 (동·북) 간도를 청국령으로 넘겨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계비가 세워지기 4년 전인 1708년 강희제의 명에 따라 프랑스인 선교사 레지(Regis)가 청과 조선의 국경을 실측하여 만든 프랑스 루이 15세 측근 지리학자 당빌의 새중국지도에는 양국의 국경은 압록강 두만강 경계를 훨씬 북으로 올라간 소위 레지선을 따라 설정되어 있어 동·북간도는 물론 서간도도 분명히 조선의 땅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위 토문강의 국경선이나 레지선은 아직도 살아 있어 장래 통일 한국의 국경은 달라질 수 있으며 중국은 동북공정등을 통해 역사적으로 만주를 터전으로 삼은 고구려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여 간도를 당연히 중국의 땅으로 굳힐려고 하고 있어 중국의 동북공정의 핵심은 결국 간도 영유권의 문제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두산의 영유권에 관련하여는 위 백두산 정계비를 설치한 목극등이 우리측 통역관 김지남등에게 백두산은 조선의 것임을 인정한 사실이 그의 기록 북정록(조선시대 선비들의 백두산 답사기 102쪽 김지남외 혜안)에 나와 있는데 1960년대 중소·중인 국경분쟁등을 계기로 중국과 북한간에도 분쟁이 있어 1962년 조중변계조약과 1960년대말-70년대 초반 조 중 국경하천협조위원회의 회의를 통해 백두산과 천지의 양분이 합의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백두산 식물생태-현지답사여행 예문동 차종한 저 160쪽)

13. 육당의 대백두 대천지 탄덕문
늦게사 올라온 일행들과 사진을 찍으며 1시간여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아쉬움을 안고 내려 오려니 자꾸만 천지와 연봉들이 아니 백두천왕님이 저를 붙잡는 것 같아 육당의 `백두산 근참기`의 마지막에 실린 `대백두 대천지의 탄덕문`을 조용히 읊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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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우리종성(種姓)의 근본이시며 우리 문화의 연원이시며
우리 국토의 초석이시며 우리 역사의 포태이시며
우리 생명의 양분이시며 우리 정신의 편책이시며
우리 이상의 지주이시며 우리 운명의 효모이신
백두대천왕전에 일심으로 귀명합니다.
일심으로 백두천왕께 귀명합니다.
.
.
. .
그리고 이어지는 백두 할아버지에게 드리는 육당의 아래의 글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통곡일 것입니다.

한아버지, 집안어른께 귀근하는 것이매 빈손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한아버지 가지고 온것이 아주 없음은 아닙니다.
제딴은 그 무엇보다 긴한 것을 가져온 꼴입니다.
한아버지에게서 받자와 가졌던 피를, 그 피가 뛰노는 염통을
오랜 신물(信物)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이 무엇보다도 한아버지께 드리는 훌륭한 제물이라 생각하고서 가지고 왔습니다.
한아버지! 제 제물을 받아 주십시오.
이제부터의 제몸과 마음과 피와 숨은 온전히 한아버지의 제사 퇴선(退膳)입니다.
한아버지의 이름으로써 이것이 모든 사람의 음복거리가 됨이 물론 저의 본회(本懷)입니다.
한아버지! 한아버지를 뵈온 이눈은 다른 아무것도 다시 보지 아니하여도 섭섭할 것 없습니다.
.
.
.

위 ‘백두산 근참기’는 육당이 일제하인 1926년 조선교육회가 주최한 백두산 압록강 박물탐사단의 일원으로 서울에서 함흥-혜산진을 거쳐 백두산에 오른 약 2주간의 일종의 기행문인데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 백두산 기행으로는 발군의 글인데 노산 이은상님도 그 언어의 풍요함을 격찬한 바 있습니다. (잃어버린 풍경 2(1920-40년)을 백두산을 찾아서 이지누 엮음 호미)
그러나 육당은 안타깝게도 일제의 조선사 편수회에 들어가 친일 지식인의 대표자가 되어 버렸으니 식민지 지식인의 한계를 그대로 들어내고 있어 우리에게 삶의 큰 교훈을 남겨 주었습니다.

서파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서둘러 내려오면서 지도를 보니 북으로는 저 멀리 장백산맥이 그 먼 너머 우리의 선조들의 터전인 대흥안령 소흥안령과 흑요분수령이 펼쳐져 있고 남으로는 마천령 함경 산맥이 뻗어 있고 그 사이 광활한 개마고원 부전고원등 한반도의 지붕을 이루고 있음을 보니 이곳이 동방의 조종의 산임과 저 아래 펼쳐진 광활한 대륙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탑방한 대협곡의 놀라운 장관은 백두산 화산활동 즉 용암분출로 생겨난 것입니다. 백두산 일대는 지질시대 제3기인 2천만년-3백만년 사이에 6회, 290만년-13만년 사이에 1회 폭발로 각 만주 일대와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자연보호구(1800m)까지 사이에 현무암고원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폭발력이 큰 산성 용암을 분출했는데 산성용암이 점성이 높아 흘러내리지 못한채 높은 층상의 화산추를 형성하여 백두산은 1200-1000m의 현무암 대지 위에 1,150m의 높이로 솟아난 대규모 화산이고 천지는 100만년전 화산 활동으로 생긴 칼데라호수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근 일대에는 지각의 파열대를 따라 지하 60km 밑에서 염기성 용암이 흘러나와 넓은 현무암 지대를 이루어 높은 것이라는데 조선 이조실록에 기록된 화산폭발것만 해도 1413년 7월, 1597년 8월, 1668년 4월, 1702년 4월의 네차례 있었다고 하며 1898년 러시아 탐험가 엔 게 가린의 기록에는 천지에서 가스와 연기가 나오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합니다.
(백두산 식물 생태 백두산 형성편 85쪽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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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백두산에서 통화 거쳐 고구려 국내성의 집안으로
백두산을 뒤로 하고 송강하, 무송현을 통화까지 왔던 길을 되짚어 오니 풍경들이 낯 익은 것 같았습니다.
특히 송강하진에는 백두산 북파에서 발원하여 장백폭포를 지나온 송화강 본류가 흘렀고 무송현은 백두산 남쪽 장백조선족 자치현서 발원한 두도(斗道)송화강이 송화강과 만나는 곳이라 더욱 반가웠습니다.
이 송화강은 북으로 흘러 흑룡강이 되어 동으로 흐르다가 연해주에서 아무르강(러시아명)이 되어 동해로 흘러드는 것을 다시 생각하니 놀랍고도 신기했습니다.

백산에서 통화로 오는 어둠속 길은 혼강과 철길을 같이 따라 왔는데 엊저녁 갈때와 같이 차창 밖으로 달과 별이 동무해 주었고 몸은 피곤했지만 백두산에 오른 감격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정신은 초롱해 졌습니다.
밤늦게 도착한 통화에서 서둘러 식사를 하고 발맛사지를 가자는 순진한 현지 가이드의 제안이 있었으나 밤이 너무 늦어 그냥 가는 대신 현지 가이드 팁을 만원씩 걷기로 타협(?)이 이루어졌습니다.
통화에서 집안까지의 남쪽으로 산을 넘고 강을 따라 난 길은 어제와는 달리 새로 달려 보는 길이라 계속 창밖을 내다 보았지만 가끔 나타나는 산속 마을은 불이 꺼진지 오래고 강물에 서산으로 기우는 달빛이 비쳐 나그네의 심사를 달래 주었습니다.

압록강변의 고구려의 고도인 집안에는 자정이 훨씬 넘어 도착하였는데 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라도 압록강에 나가보고 국내성에라도 다녀올 텐데 내일도 새벽에 출발이라니 참을 수 밖에 없어 몹내 아쉬웠습니다.
다음날 새벽 5시경 일어나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하고 서둘러 단동을 향해 떠났는데 가는 길에 마침 시내 통구하 강가의 국내성 성터가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것을 보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서너번 온 곳이기도 하지만 너무나 귀한 우리 고구려의 역사 현장을 한번이라도 더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습니다.

집안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2대 유리왕부터 장수왕까지 425년간 도읍지로서 국내성과 산성자성(환도성)이 있는 곳인데 동천왕 고국원왕 광개토대왕의 애환과 영광이 깃들어 있어 우리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곳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만주지역의 뿌리가 되는 고구려의 중국화를 제일 먼저 하였고 이 지역의 고구려 문화유산을 유네스코에 등록하여 고구려의 정통성이 중국에 있는 것처럼 되었으니 애통한 노릇입니다.

이곳의 유물로는 광개토대왕릉비, 장군총, 대왕릉, 무용총등 고분등이 있고 1만2천여기의 고구려 무덤은 대부분 댐으로 수장되고 말았으니 남의 나라에 맡긴 우리의 유물 유적의 운명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충주의 중원고구려비와 함께 우리고대사 연구에 없어서는 안될 유물로써 이비에는 광개토대왕이 고구려의 시조 주몽(추모)의 17세손으로 나와 있는데도 현재 우리역사학계에서 삼국사기를 근거로 주몽의 12세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역사학계는 주몽과 2대 유리왕 사이에 다섯왕이 더 있었다며 고구려 건국연대를 240년 정도 더 올라 가는 것으로 정리한 바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몽은 부루와 함께 부여의 해모수의 아들인데 고구려 6대왕 태조때 성이 해씨에서 고씨로 바뀌는등에 비추어 부여-고구려관계등 고구려 초기의 역사에는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발로 쓴 반 동북공정 154-156쪽)

14. 집안서 단동·대련의 천리길 달려 귀국길에 오름
집안에서 단동으로 가는 길은 압록강에서 멀지 않은 비교적 한산한 시골길이었고 주위의 평화로운 농촌 마을의 연속이었고 가끔 높지 않은 고개를 넘는 산촌도 보였습니다.
중간에 유림진을 지나 압록강에 가까운 읍내에 반가운 한글로 된 간판이 보였는데 전에도 들른 적이 있는 냉수(冷水)조선족향이었고 문화센터 같은 멋진 건물이 있어 들려 보고 싶었으나 갈길이 멀어 계속 가니 만주족 마을에도 만주풍의 센터가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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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서 얼마 안가서 눈앞에 큰 혼강이 펼쳐져 있고 강 위로 대교가 우람히 서 있는 데 지도를 보니 이곳이 길림성 집안에서 요령성 관전 만족 자치현으로 넘어가는 성경계였습니다.
멀리 백산서 통화, 환인 지나 흘러 온 혼강은 여기서 곧장 조금 더 흘러 압록강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인데 압록강물은 일제시 건설하여 중국과 북한이 공동운영하는 수풍댐에 막혀 호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집안쪽 강위에 큰 장이 서서 북적대고 있어 버스로 지나가기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혼강을 건너 만나는 강변공원의 작품같은 화장실에 들리고 저 아래로 유장히 흐르는 강물과 야생 오리떼들을 내려다보니 곧장 강변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습니다.

혼강을 따라 산중턱을 깍아 낸 길을 계속 따라 갔는데 전망이 시원하였으나 강변산이 속살을 들어 내고 있어 큰 비라도 오면 산사태가 날 것 같아 걱정이 되었습니다.
혼강을 헤어진지 얼마되지 않아 거리에 시장이 선 하로하조선족이란 읍내를 지나쳐 평화로운 마을들을 1시간여 달리니 드디어 영전 진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은 엊그제 단동서 백두산갈 때 북쪽 만족자치현 소재지로 가는 갈림길에 있던 도시여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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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 단동까지는 오던 길이라서 친숙하였고 2-30분 후 다시 압록강을 만나니 반갑기 그지 없었습니다.
호산산성을 지나 잠시 잊고 있던 마라톤 주로를 따라 도착한 단동에서 간단히 식사를 하고 곧장 대련으로 201번 고속도로를 따라 직행하였습니다.

가이드 이창재님의 강권으로 부른 새신부 강보경님의 영화 미션에 나온 곡과 오솔레미오를 들으니 긴 여정의 피로가 싹 가셨고 차내 분위기가 격조 높은 흥으로 가득찼습니다.
단동을 떠나 동항시를 지날 무렵 황금평이 다시 생각났는데 일제하인 1935년 아동문학가인 김우철님이 당시 일명 유초(柳草)도라고 부른 이 섬에 머물면서 지은 압록강 시를 읽어 보았습니다.

백두산 천지 물이 넘쳐 흘러서
동쪽으로 흘러가면 두만강의 물줄기
서쪽으로 굽이돌아 흘러 내리니
예가 천리 장강 압록강이외다.
달밤에 이강을 건너는 나그네의 눈물과
캄캄 칠야! 밀매꾼의 발자취 소리와
안개 낀 새벽 뗏목군의 콧노래를
귀담아들으면서
산곡을 굽이 돌고 섬을 지나
황해로 흐르기 몇 해던가?
얄룹강, 얄룹강,
흰 돛, 검은 듳을 싣고 흘러내리는 `아리나레`여
내사랑하는 청년
그대 오리강의 구슬픈 노래에
두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는가?
이 강가에 사는 수백만 백성들의
가난한 생활 악보를!
국경을 그림 그리며
독사 꼬리같이 줄기차게 흘러내리는
얄룹강, 검푸른 흐름이여!
우리는 너를
사랑하면서도 사랑하지 못할
삶과 죽음의 장강이라 부른다.
(잃어버린 풍경 2(1920-40년) `백두산을 찾아서`, 이지누 엮음 호미)
목적지인 대련공항에 도착하여 지난 3박 4일간의 일정을 돌아보니 퍽 오래되었고 마치 꿈속의 일같이 느껴졌습니다.
동고동락한 일행들과 헤어짐이 못내 아쉬었으며 에스앤비 덕분에 뜻깊고 알찬 여행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한 마음이 새삼 샘솟았고 벌써 다음 마라톤 기행이 기다려졌습니다. 탐방기(1-3편)끝.

후기: 중국서 귀국한 주말인 6. 2. 매년 참가해온 바다의 날 마라톤을 뛰었고 지난 7. 1. 고향인 강릉의 경포마라톤까지 사이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현장서 찍어 온 수백장의 사진들을 여러차레 보면서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요동반도를 둘러 싼 우리와 중국의 역사와 백두산의 자연과 인문지리등은 물론이고 중국과 우리의 현안문제등에 관한 책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위 여행기에 소개한 책들 외에 소개하고 일독을 권하고 싶은 것은 손경석님의 `북한의 명산`(서문당), 김태정님의 `백두산의 우리꽃`(현암사), 문정인님의 중국의 내일을 묻다(삼성경제연구소)와 영국인 영 허스번드의 `카라코럼을 넘어서`(The Heart of Continent)와 `히말라야의 경이`(Wonders of Himalaya)입니다.
문정인교수님의 책은 문교수님이 2009-2010년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의 동북공정등 한 중 관계의 현안등에 관해 중국최고지성들과 대담한 내용을 싣고 있고 영 허스번드는 군인이자 탐험가로 1886년 서양인으로 최초로 백두산에 오르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한 바 있으며 1921년 에베레스트 등반을 처음 제창한 히말라야 선구자로서 저도 위 책들을 읽고 중앙아시아나 캐라코럼에 빠져 곤륜과 K2 BC와 곤도골로라를 넘기도 한 적이 있는데 한편 1904년 영국 티베트 점령군 대장으로 장체성을 공격, 파괴한 장본인임을 소개 드리면서 저의 긴 탐방기를 읽어 주신 달님이 벗님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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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MR.yang님의 댓글

MR.yan… 작성일

대단한 단동마라톤완주,백두산 천지등정후기 잘봤습니다...

저두 이번5월말에 갔다왔었는데..일정은 엄청나게 빡셌지만....

지금생각해보니....마음속깊이  뿌듯한  느낌이  드네요....^^

이도현님의 댓글

이도현 작성일

참가기 읽으면서 우리 고대역사에 대하여 새로이 공부하게 되었고 사진까지 넣어주셔서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끝부분에

고향이 강릉이시고 경포마라톤대회에도 참가하셨다니 또한 반갑고 감사합니다. 저는 2008년도에 위 대회에 참가했었는데

그때의 감격이 새롭게 기억되어 현장감이 더했습니다.

앞으로도 참가후기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