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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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프라하마라톤참가기-박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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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성배 댓글 1건 조회 14,395회 작성일 13-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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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실패 안겨준 체코 프라하마라톤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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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필>


51세 / 리엑션엔지니어링 대표


2005년 마라톤 입문


풀코스 최고기록 2:45:48


세계 5대 메이저대회 서브3 완주(2011)


세계 골드라벨 대회 서브3 완주 도전 중


마라톤 동호인들이 한창 상반기 기록 도전에 열중하고 있던 지난 5월, 나는 동유럽의 작은 나라 체코에 있었다. ‘세계 골드라벨 대회 서브3 완주’ 라는 미션 때문이다. 이건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 그리고 마라톤에 관한 정보라면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마니아들만 아는 일이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응원하지도 않고, 누가 상이나 인증서를 주는 것도 아니며, 스폰서나 방송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만들어 내가 수행하는 도전과제다.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젊어서부터 등산에 푹 빠져 살다가 2005년에 마라톤을 시작했는데 남들보다 소질이 있음을 에 깊이 빠져들다 보니 ‘서브3’와 ‘2:45’에 도전하게 됐고, 보스턴마라톤 참가를 계기로 ‘세계 5대 메이저대회 서브3 완주’에도 도전했다. 그 도전이 끝나자 더욱 확장된 미션을 만든 게 바로 ‘골드라벨 대회 서브3 완주’다. 지금까지 국내 골드라벨 대회인 서울국제마라톤과 조선일보춘천마라톤을 비롯해 도쿄, 보스턴, 베를린, 뉴욕, 런던, 시카고, 샤먼, 호놀룰루 마라톤대회에 참가해 모두 서브3 기록으로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내 최고기록(2:45:48)을 감안하면 서브3는 어려운 목표가 아니다. 코스나 기후조건, 시차적응 등이 영향을 끼치더라도 무난하게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이다. 게다가 해외대회 경험이 쌓이다 보니 여유도 좀 생기고 적응력도 좋아졌다. 하지만 동시에 긴장이 느슨해지고 자만심이 조금씩 쌓였던 모양이다.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던 프라하마라톤에서 뜻밖의 ‘1패’를 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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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가 문제였나, 아니면 내가 문제였나?


그러니까 이 글은 흔한 해외마라톤 성공담이 아니라 쓰라린 패배에 대한 자기분석인 셈이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


돌이켜보면 지난 겨울훈련이 잘못 끼워진 첫 번째 단추였던 것 같다. 해를 넘겨 쉰 하나가 되면서 ‘이제 기록을 당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연초에 고수들의 집합소로 불리는 ‘나이키245클럽’에 가입했다. 확실히 고수들 틈에 있으니 배울 점도 많고 자극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클럽 회원들과의 합동훈련과 별도로 개인훈련을 추가해 훈련량을 늘렸다. 그때까지는 월 훈련거리 360km 내외가 최고치였는데 월 400km로 상향 조정했다. 따라서 주당 80~90km를 소화하는 셈이었다. 추위에 약한 편이라 겨울철에 상승세를 타기 어려운데도 기량 향상 욕심이 앞섰던 것이다. 이게 첫 번째 실수였다.


2월 초 동계풀코스마라톤에서 2시간 55분대의 저조한 기록을 찍은 뒤 구정 연휴동안 연달아 장거리 훈련을 실시했다. 몸이 살아나기는커녕 한 단계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제서야 몸에 뭔가 문제가 생겼구나 생각을 했다. 2월 18일에는 ‘아 고구려 역사지키기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5km 정도 지나자 도무지 몸이 나가지 않아 정상적인 레이스를 할 수가 없었다. 결국 25km 만 뛰고 경기를 포기했다.


이후 훈련을 중단하고 휴식을 취했지만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다. 더 쉬어야 하는 건지 훈련하면서 몸 상태를 끌어올려야 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물쭈물하는 동안 3월 1일 울산마라톤대회가 다가왔다. 내가 속한 ‘나이키245클럽’이 단체로 참가하는 대회였다. 마지못해 따라가기는 했지만 컨디션도 엉망이고 자신감도 떨어진 상태라 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마침 비가 많이 오기에 그 핑계를 대고 쉴까 했는데 당일 아침에 거짓말처럼 개버려서 결국 출발선에 섰다. 이게 두 번째 실수였다.


뛰어보니 예상대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하프 반환점에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했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무심코 뛰다가 하프 반환점을 지나쳐버린 것이다. 낭패였다. 뒤늦게 턴을 해서 돌아가면 부정행위 같은 모양이 돼버리는데다 사람들 이목도 집중되지 않겠는가. 결국 풀코스를 다 뛰어야 했다. 어떻게든 3시간 안쪽으로 들어가보려 했지만 페이스도 망가진 상태고 언덕도 많아서 3시간 4분대기록으로 간신히 골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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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행 포기했는데 동유럽 여행을 가게 되다니!


컨디션이 완전히 꼬였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진짜 휴식을 결심하게 됐다. 내심 기록을 노렸던 서울국제마라톤에서는 서브3에 처음 도전하는 회원을 일부 구간만 동반주해주는 걸로 만족했다. 이후 훈련을 줄이면서 컨디션 변화를 주시해 보았지만 일시적으로 나아지는 듯하다가 다시 쫙 가라앉곤 했다.


결국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상반기 메인 이벤트로 삼았던 체코 골드라벨 대회 프라하마라톤 참가를 포기한 것이다. 동계훈련은 과훈련이 분명했고, 그 와중에 나간 대회에서는 저조한 기량을 확인했으니 더 고민할 것이 없었다. 미련 없이 항공권을 취소했다.


그런데 무슨 조화일까.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동유럽 여행을 가자고 조르는 게 아닌가. 나는 당연히 싫다고 손사래를 쳤다. 눈물을 머금고 프라하마라톤을 포기했는데 그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어떻게 여행을 갈 수 있겠는가. 게다가 동유럽 쪽은 몇 차례 여행한 적이 있어서 관광에 열중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내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딸 솔이에게 꼭 보여주고 싶다며 셋이서 추억을 만드는 일이니 같이 가자고 졸랐다. 솔이 얘기에 백기를 들고 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스케줄을 잡고 보니 공교롭게도 일정을 따라가다 보면 프라하마라톤이 열릴 때 체코에 머물 수 있었다. 해외마라톤 신청은 한 번 결제를 하면 환불이 안 되기 때문에 나의 참가 자격은 유효한 상태였다. 아~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그냥 간 김에 뛸까?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도 아닌데다가 아내와 딸도 싫어하기는커녕 적극 응원을 해준다. 아무리 상태가 나빠도 페이스 조절만 잘 하면 서브3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끝에 출전을 결심했고, 그게 세 번째 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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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 미스와 악재의 연속…그래도 출발신호는 울린다


갑자기 몸을 되살릴 수는 없으니 장비라도 제대로 챙겨가기로 했다. 체코는 유럽 여러나라 중에서도 도로 사정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이전 여행을 통해 알고 있었다. 작은 벽돌로 만든 옛 도로를 그대로 보존하기 때문인데, 아스팔트에 익숙한 외국 러너들에게는 큰 장애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하면 불규칙한 노면에 대응할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하다가 유난히 볼이 넓은 경기화를 선택했다. 낡긴 했지만 볼이 좁은 다른 러닝화보다는 안정감이 있을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네 번째 실수였다.


대회 전까지 나름대로 몸 조심을 했지만 대회 전날 야경을 보느라 충분히 휴식을 취하지 못했다. 게다가 외국에 나가면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타입이라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6시에 호텔을 나왔는데 생각보다 대회장이 가까워서 20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출발이 8시라 1시간 반 이상 멀뚱멀뚱 서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렇게 엉성하게 대회에 임했을까. 자신감이 떨어진 탓일까, 단지 피곤해서였을까? 좌우지간 마지막 다섯 번째 실수였던 것 같다.


프라하마라톤은 작은 대회였다. 풀코스를 포함한 총 인원이 7000명 정도에 불과해서 웅장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인파에 파묻힐 걱정은 없을 터이므로 그나마 안심이 됐다. 그동안 경험한 해외대회와는 사뭇 다른 레이스가 시작됐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출발선을 통과했다.


마라톤에서 서브3를 달성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매 킬로미터당 4분 15초 안쪽으로 달리면 된다. 페이스를 단 몇 초씩만 당겨도 훨씬 여유 있는 서브3가 되며, 4분 벽을 뚫으면 나름 고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문제는 4분 15초 페이스에서 단 1초씩만 초과해도 턱걸이로 서브3를 놓친다는 점이다. 컨디션이 좋을 때야 연습한 대로 페이스를 착착 맞춰가며 뛰면 그만이지만 컨디션이 꼬여있을 땐 어느 시점에서 페이스가 곤두박질칠 지 모른다.


초반에 4분 5초 내외로 달렸다. 5km쯤 가니 페이스가 비슷한 무리가 눈에 띄었다. 돋보이는 외모의 여성 주자 주위에 남성 주자들 여럿이 호위하듯 동반주 하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그네들 사이에서는 우리나라의 김영아 씨(‘마라톤 천사’로 불리는 유명한 여성 마스터스 고수) 정도로 인기 있는 러너인 듯했다. 나도 그들 틈에 껴서 따라갔다. 그들을 페이스메이커 삼아 달리면서 힘을 비축하자는 계획이었다. 물론 멋진 여성 주자의 뒷모습도 더 감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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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에서의 아쉬운 패배, 그러나 더없이 소중한 경험


그러나 여자는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슬슬 밀리는 형편이었다. 여자를 ‘호위’하던 주자들은 느려진 페이스에 어느 정도 맞춰주는 듯하더니 곧 하나 둘 떠나버렸다. 4분 10초 정도 페이스로 처진 여자와 나는 서로 끌어주며 20km 지점까지 동반주를 했다.


다시 페이스가 밀리기 시작했다. 4분 15~20초 페이스가 찍혔다. 여자는 잠시 내 페이스를 관망하더니 곧 나를 버리고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겨우 중반을 넘었을 뿐인데 서브3 페이스를 벗어나다니. 더 이상 처지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힘을 내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나름 머리를 써서 골랐던 볼 넓은 경기화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넓은 볼은 안정감을 더해주지 못했고, 오히려 낡은 창이 불규칙한 노면을 견디지 못해 멋대로 휘어졌다. 그 여파가 몸에 쌓이더니 중반 이후에는 발이 휘청거리고 허리도 욱신거렸다. 페이스를 회복하기는커녕 유지하는 것도 어려웠다.


36km까지 가는 동안 페이스는 4분 30초까지 밀렸다. 설마 설마 했던 서브3 실패가 점점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를 버리고 간 여성 주자가 보였다. 나보다 더 비실거리는 모습이었다. ‘날 버린 사람’이지만 반가워서 다시 몇 킬로미터쯤 같이 달렸다. 하지만 페이스 조절에 완전히 실패했는지 좀처럼 따라오지 못하기에 이번엔 내가 그녀를 버리고 앞으로 나갔다.


남은 거리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너무 지쳐서가 아니라 딸 솔이가 실망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친 다리를 이끌고 3시간 6분 23초로 결승점을 통과하자 응원하러 나와있던 딸아이의 가열찬 타박이 쏟아졌다.


“아빠~ 이게 뭐야! 저번에도 늦더니 이번엔 더 늦어잖아. 세시간을 넘기면 어떡해~! 두시간 오십분 안에는 들어와야지~!”


딸 앞에선 컨디션이 어떻고 나이가 어떻고 하는 변명이 전혀 안 통한다. 호랑이 코치나 다름없다. 다음번엔 꼭 좋은 기록으로 들어오겠노라 연신 약속을 하면서 대회장을 빠져나왔다.


나머지 여행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레이스에 대해 생각해보았는데, 분하다거나 안타깝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지난 겨울부터 이어진 잘못 된 판단과 실수들을 반추하면서 당연한 결과임을 인정하게 됐다. 마라톤은 오묘하다. 방심 조금, 자만심 조금으로도 실패를 맛보게 된다. 하지만 다시 열심히 준비하면 만회할 기회는 얼마든지 주어진다. 그러니 스스로 나이를 의식해서 조급해하지 말아야겠다. 러너에게 나이란 숫자에 불과한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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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밤톨님의 댓글

밤톨 작성일

대단한 열정이십니다.

세계5대메이져대회도 써브3로 완주하시고.....

대한민국에 그런 기록을 갖고 계신분은 없습니다.